[팬소설-UCC이벤트]회귀하는 게

철썩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첫날. 나는 해안에서 눈을 떴다. 몸은 찜통에 푹 익은 것처럼 붉은 갑각, 양손 대신 집게, 말을 할 때마다 입에서 나오는 거품.

나는, 게다.

*

빌어먹을 유배자들과 전투를 벌인지도 벌써 2,274일. 날짜는 천 단위에 불과하나 죽음의 횟수로 따지면 그 수천, 수만 배는 되리라.

지금도 그렇다.

저 멀리서 나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오는 유배자, 새하얀 도복을 입고 살인에 미친 도살자처럼 웃으며 무기를 휘두른다. 그러고는 내가 바다 깊은 곳에서 힘겹게 구한 희귀한 아이템을 무참히도 뺏어간다. 심지어는 내 시체까지 뒤집어 더 없지 살펴보는 지독한 놈들.

나는 유배자가 싫다.

몇 달을 주기로 유배자들이 약해지기는 하지만, 그들의 성장 속도는 한정된 세계에 갇힌 내가 따라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기껏해야 보스의 눈에 들어 곁가지로 소환되는 정도일까.

세상이 닫혔다.

관찰자인 유배자들이 사라지면, 세상은 또 다른 유배자의 방문을 대비해 최초의 상태로 돌아간다. 뭉개졌던 갑각이 짓눌러진 주둥이가, 뽑아 뜯긴 집게가 원상태로 돌아오고 인지할 수 없는 강제적인 힘에 의해 다시 바다 깊숙한 곳에서 눈을 뜬다.

나는 회귀하는 게다.

*

몇 개월의 시간이 흐르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좀비 따위를 부리며 지나가는 어린 위치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변형리그.`

초기에는 은인자중하여 성장을 도모하거나 그들이 놓친 `1`이 되는 게 목표이다. 그러나.

"여깄었구나, 눈알!"
`...?`

분명 나와 똑같이 생긴 유령인데 놈의 움직임은 게의 그것이 아니었다. 미친 듯이 움직이는 다리와 강력한 집게의 힘. 나는 단숨에 두 동강이나 내장을 흘리며 익숙한 죽음을 받아들였다.

싶었으나.

어린 위치는 이제까지 유배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던 나의 내장 조각을 잡아 들더니 깔깔 웃고는 기묘한 관과 수상한 인물에게 건넨다.

그러자 내 정신이 기묘한 관 안으로 빨려들었고 해안에 존재하는 다른 회귀자들과 육체가 섞이고 영혼이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 당신은.`

해안의 보스가 관의 중앙에서 팔짱을 끼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를 하찮다 여긴 저들에게 복수할 기회다. 모두, 힘을 빌려다오."

평소 말이 많지 않고 우리에게 간섭하지도 않던 그가 절절한 음색으로 부탁한다. 듣기로, 그는 유배자들의 악행으로 가족을 잃고 신들의 저주를 받아 이곳에 끌려 왔다고.

우리와 같은 처지.

그것이 우리를 하나로이었다.

쾅!

익사한 시체이자 전직 검투사였던 자가 관이 부수고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어린 위치가 부리는 좀비들이 공격해온다.

검투사는 밀리지 않았다. 우리와 보스의 힘을 비롯해 알 수 없는 힘이 우리를 돕는 느낌이었다.

서른 번의 주먹질로 좀비들의 목을 따버린 검투사가 포효하며 무방비가 된 어린 위치에게 달려들자.

"흥."

소녀는 콧방귀를 끼며 장갑에 꽂힌 붉은 보석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이런, 바알!`

덜그럭.

다른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소환되는 수십 기의 해골들은 붉고 푸른 안광을 터트리며 검투사를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더는 버틸 수 없게 된 그를 대신해 나선 것은.

플리커 스트라이크!

우리의 머릿속으로 울리는 그의 기합. 호랑이의 어금니로 만들었다는 검을 쥐고 해골들의 후두부를 강타하는 보스. 너무도 빠른 속도를 제어할 수 없어 어린 위치를 직접 공격하지는 못했지만, 주변을 장악하던 해골들의 기세는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어린 위치 주변으로 공터가 생기자 이 틈을 노리지 않고 소녀의 등 뒤로 점멸하여 목을 베어내는 순간.

"이모탈 콜!"

소녀는 불사자의 힘을 불러 보스의 공격을 막았다. 마나를 전부 소모한 보스는 그대로 검을 늘어트리며 무릎을 꿇었는데, 유배자는 그 틈을 노리고 나를 빼닮은 유령 게 두 마리를 지휘해 그의 양팔을 잘랐다.

아니, 자를 뻔했다.

포이즌 스파이더가 어린 위치의 목에 이를 틀어박지 않았다면 말이다.

"케흑."

위치의 마나가 끊기자 우리를 위협했던 유령들이 사라졌다. 곧이어 위치의 시체도 빛 알갱이로 화해 해풍에 쓸려간다. 세계에서 이탈한 것이다.

기지를 발휘한 포이즌 스파이더를 모두가 칭찬할 때에, 보스는 땅에 터미너스 소드를 박아 넣고 큼지막한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드디어…. 복수에 성공했소. 레나, 셀린."

즈으응

저 멀리, 푸른 포탈에서 표독스런 낯으로 이쪽을 쏘아보는 어린 위치가 다가온다. 군세를 보아하니 만반의 준비를 한 모양.

제기랄.

철컹

보스가 검을 든다.

쉬익

포이즌 스파이더가 주둥이에 독을 문지른다.

크르르

전직 검투사가 가슴을 두드린다.

탁탁

언젠가 갇힌 세상이 해방될 때를 바라며. 나는 오늘도 집게를 든다.
마지막 추천 2020. 1. 13. 오전 12:0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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